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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윤동주 시

푸른 메아리 2021. 5. 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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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윤동주 시 (1)

굴뚝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윤동주(尹東柱, 1917~1945)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하였다. 연희전문 문과 졸업, 일본 입교 대학, 동지사대학 영문과 수학, 식민지의 슬픔을 지성적으로 다룬 것이 특징이다. 민족시인으로 불려진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비둘기

안아보고 싶게 귀여운

산비둘기 일곱 마리

하늘 끝까지 보일 듯이 맑은 공일날 아침에

벼를 거두어 빤빤한 논에

앞을 다투어 모이를 주우며

어려운 이야기를 주고받으오.

 

날씬한 두 나래로 조용한 공기를 흔들어

두 마리가 나오

집에 새끼 생각이 나는 모양이오.


 

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분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리마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해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해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아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자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고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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