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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윤동주 시

푸른 메아리 2021. 5. 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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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윤동주 시 (2)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모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尹東柱, 1917~1945)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하였다. 연희전문 문과 졸업, 일본 입교 대학, 동지사대학 영문과 수학, 식민지의 슬픔을 지성적으로 다룬 것이 특징이다. 민족시인으로 불려진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노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이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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