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시모음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1937) / 낡은 집(1938) /그리움(1945)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 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 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말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낡은 집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붙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 날 밤
저릅 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도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쫒아다니던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 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우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도서 취미 > 좋은 글과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섭 : 성북동 비둘기(1969) (0) | 2022.05.22 |
---|---|
신동엽시인 : 껍데기는 가라 / 봄은 (0) | 2022.05.21 |
최두석 시인 : 성에꽃 (0) | 2022.05.15 |
박두진 시인 : 어서 너는 오너라 (0) | 2022.05.13 |
서정주 시모음 : 자화상 /추천사(鞦韆詞) /무등을 보며 /동천(冬天) (0) | 2022.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