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도서 취미 57

이용악 시 :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낡은 집 /그리움

이용악 시모음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1937) / 낡은 집(1938) /그리움(1945)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집도 아니고 일가 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 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 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말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

김광섭 : 성북동 비둘기(1969)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

신동엽시인 : 껍데기는 가라 / 봄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1967) / 봄은(1968) 껍데기는 가라(1967)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든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 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봄은(1968)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

최두석 시인 : 성에꽃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지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 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박두진 시인 : 어서 너는 오너라

어서 너는 오너라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닥도 않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않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

서정주 시모음 : 자화상 /추천사(鞦韆詞) /무등을 보며 /동천(冬天)

서정주 시모음 : 자화상 /추천사(鞦韆詞) /무등을 보며 /동천(冬天)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吾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솥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튀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

신석정 시인 : 들길에 서서 / 꽃덤불

신석정 시인 : 들길에 서서(1939) / 꽃덤불(1946) 들길에 서서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꽃덤불 태양을 의논(議論)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

조지훈 시인의 승무, 봉황수

조지훈 시인의 승무(1939), 봉황수(1940) 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는 삶의 번뇌와 세속적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하기를 소망하는 시이다. 달이..

한하운 시인 : 보리 피리 / 파랑새

[한하운 시인 : 보리 피리 / 파랑새] 보리 피리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ㅡ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ㅡ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ㅡ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ㅡㄹ 닐니리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우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한하운(1919년~1975년) : 함경남도 함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리 농림학교에 진학한 후 중국 국립 북경대학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개마고원 개간에 전념하였습니다. 경기도청 축산과 근무 때 나병 발병과 치료를 시작하였고 함흥 학생의거 사건으로 소련군에 체포되어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한국의 명시 : 노천명 시 모음

[한국의 명시 : 노천명 시 모음]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을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