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집 6
비단 안개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릴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요,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릴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마 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던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알지 못할 무엇에 취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릴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잊던 때도 그런 날이요,
영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꿈
닭 개 짐승조차도 꿈이 있다고
이르는 말이야 있지 않는가,
그러하다, 봄날은 꿈꿀 때,
내 몸에야 꿈이나 있으랴,
아아 내 세상의 끝이여,
나는 꿈이 그리워, 꿈이 그리워.
부엉새
간밤에
뒷창 밖에
부엉새가 와서 울더니,
하루를 바다 위에 구름이 캄캄.
오늘도 해 못 보고 날이 저무네.
후살이
홀로된 그 여자
근일에 와서는 후살이간다 하여라.
그렇지 않으랴, 그 사람 떠나서
이제 십년, 저 혼자 더 살은 오늘날에 와서야......
모두다 그럴듯한 사람 사는 일레요.
장별리
연분홍 저고리 빨갛게 불붙는
평양에도 이름 높은 장별리(將別里).
글실 은실의 가는 실비는
비스듬히 내리네, 뿌리네,
털털한 배암 무늬 양산에
내리는 가는 실비는
위에랴 아래랴 내리네, 뿌리네.
흐르는 대동강 한복판에
울며 돌던 벌새의 떼무리,
당신과 이별하던 한복판에
비는 쉴 틈 없이 내리네, 뿌리네.
산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 팔십 리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바다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잦는
붉은 풀이 자라는 바다는 어디
고기잡이꾼들이 배 위에 앉아
사랑 노래 부르는 바다는 어디
파랗게 좋이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놀 스러지는 바다는 어디
곳 없이 떠다니는 늙은 물새가
떼를 지어 쫓이는 바다는 어디
건너 서서 저편은 딴 나라이라
가고 싶은 그리운 바다는 어디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 임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임의
무덤의 풀이라도 태웠으면!
그를 꿈 꾼 밤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들리는 듯, 마는 듯, 발자국 소래.
스러져가는 발자국 소래.
아무리 혼자 누워 몸을 뒤져도
잃어버린 잠은 다시 안 와라.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길
어제도 하룻밤
나그네 집에
까마귀 까악까악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 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 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定州 郭山)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