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집 8
바리운 몸
꿈에 울고 일어나
들에
나와라.
들에는 소슬비
머구리는 울어라.
풀 그늘 어두운데
뒷짐지고 땅 보며 머뭇거릴 때,
누가 바딧불 꾀어드는 수풀 속에서
'간다 잘살아라' 하며, 노래불러라.
맘에 속의 사람
잊힐 듯이 볼 듯이 늘 보던 듯이
그립기도 그리운 참말 그리운
이 나의 맘에 속에 속 모를 곳에
늘 있는 그 사람을 내가 압니다.
언제도 언제라도 보기만 해도
다시 없이 살뜰한 그 내 사람은
한두 번만 아니게 본듯 하여서
나자부터 그리운 그 사람이요.
남은 다 어림없다 이를지라도
속에 깊이 있는 것, 어찌하는가.
하나 진작 낯 모를 그 내 사람은
다시 없이 알뜰한 그 내 사람은......
나를 못 잊어 하여 못 잊어 하여
애나는 그 사랑이 눈물이 되어,
힌끗 만나리 하는 내 몸을 가져
몹쓸음을 둔 사람, 그 나의 사람?
밭고랑 위에서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
일을 마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내려 쪼이며
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 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었어.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 새로운 환희를 지어 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 한번 활기있게 웃고나서, 우리 두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들고 들어갔어라, 가지런히 가지런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여, 오오 생명의 향상이여.
엄숙
나는 혼자 뫼 위에 올랐어라.
솟아 퍼지는 아침 햇볕에
풀잎도 번쩍이며
바람은 속삭여라.
그러나
아아 내 몸의 상처 받은 맘이어
맘은 오히려 저리고 아픔에 고요히 떨려라
또 다시금 나는 이 한때에
사람에게 있는 엄숙을 모두 느끼면서.
묵념(默念)
이슥한 밤, 밤기운 서늘할 제
홀로 창턱에 걸어앉아, 두 다리 늘이우고,
첫 머구리 소리를 들어라.
애처롭게도, 그대는 먼첨 혼자서 잠드누나.
내 몸은 생각에 잠잠할 때, 희미한 수풀로서
촌가의 액(厄)맥이 제(祭)지나는 불빛은 새여오며,
이윽고, 비난수도 머구리 소리와 함께 잦아져라.
가득히 차오는 내 심령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무심히 일어 걸어 그대의 잠든 몸 위에 기대어라
움직임 다시 없이, 만뢰(萬籟)는 구적(俱寂)한데,
회요(熙耀)히 나려비추는 별빛들이
내 몸을 이끌어라, 무한히 더 가깝게.
적어졌소
적어졌소 적어졌소,
당신이 못내 생각
나를 생각하던 생각 적어졌소.
적어졌소, 적어졌소.
오늘을 종일 일에 부대끼우고
어스름을 맞춘 님 오나 안 오나
들끝 갈밭 속에 갈까 말을까
고목 등걸 기대고 조바심할 때.
희망
날은 저물고 눈이 내려라
낯설은 물가으로 내가 왔을 때.
산 속의 올빼미 울고 울며
떨어진 잎들은 눈 아래로 깔려라.
아아 소쇄(蕭殺)스러운 풍경이어
지혜의 눈물을 내가 얻을 때!
이제금 알기는 알았건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갓 아름다운 눈얼림의 그림자뿐인 줄을.
이울어 향기깊은 가을밤에
우무주러진 나무 그림자
바람과 비가 우는 나엽 위에.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루라도 몇 번씩 내 생각은
내가 무엇하라고 살랴는지?
모르고 살았노라, 그럴 말로
그러나 흐르는 저 냇물이
흘러가서 바다로 든댈진댄.
일로 쫓아 그러면, 이내 몸은
애쓴다고는 말부터 잊으리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그러나, 다시 내 몸,
봄빛의 불붙는 사태흙에
집짓는 저 개미
나도 살려 하노라, 그와 같이
사는 날 그날까지
살음에 즐거워서,
사는 것이 사람의 본 뜻이면
오오 그러면 내 몸에는 다시는 애쓸 일도 더 없어라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반달
희멀끔하여 떠돈다, 하늘 위에,
빛죽은 반달이 언제 올랐나!
바람은 나온다, 저녁은 춥구나,
흰물가엔 뚜렷이 해가 드누나.
어두컴컴한 풀없는 들은
찬 안개 위에로 떠흐른다.
아, 겨울은 깊었다, 내 몸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 앉는 이 설움아!
가는 님은 가슴엣 사랑까지 없애고 가고
젊음은 늙음으로 바뀌어든다.
들가시나무의 밤드는 검은 가지
잎새들만 저녁빛에 희끄무레 꽃지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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