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집 9
술
술은 물이외다, 물이 술이외다.
술과 물은 사촌이외다, 한데
물을 마시면 정신을 깨우치지만서도
술을 마시면 몸도 정신도 다 태웁니다.
술은 부채외다, 술은 풀무외다.
풀무는 바람개비외다. 바람개비는
바람과 도깨비의 어우름 자식이외다.
술은 부채요 풀무요 바람개비외다.
술, 미시면 취케 하는 다정한 술,
좋은 일에도 풀무가 되고 언짢은 일에도
매듭진 맘을 풀어 주는 시원스러운 술,
나의 혈관 속에 있을 때에 술은 나외다.
드리는 노래
한집안 사람 같은 저기 저 달님
당신은 사랑의 달님이 되고
우리는 사랑의 달무리 되자
쳐다보아도 가까운 달님
늘 같이 놀아도 싫잖은 우리
믿어움 의심 없는 모름의 달님
당신은 분명한 약속이 되고
우리는 분명한 지킴이 되자
밤이 지샌 뒤라도 그믐의 달님
잊은 듯 보였다가도 반기는 우리
귀엽긴 귀여워도 의젓한 달님
여수(旅愁)
1
유월 어스름 때의 빗줄기는
암황색의 시골(屍骨) 을 묶어 세운 듯,
뜨며 흐르며 잠기는 손의 널 쪽은
지향도 없어라, 단청(丹靑)의 홍문(紅門)!
2
저 오늘도 그리운 바다,
건너다보자니 눈물겨워라!
조그마한, 보드라운 그 엣적 심정의
분결 같은 그대의 손의
사시나무보다도 더한 아픔이
내 몸을 에워싸고 휘떨며 찔러라.
나서 자란 고향의 해돋는 바다요
무신(無信)
그대가 돌이켜 물을 줄도 내가 아노라.
'무엇이 무신함이 있더냐?' 하고,
그러나 무엇하랴 오늘날은
야속히도 당장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을, 물과 같이
흘러가서 없어진 맘이라고 하면.
검은 구름은 멧기슭에서 어정거리며,
애처롭게도 우는 산의 사슴이
내 품에 속속들이 붓안기는 듯.
그러나 밀물도 쎄이고 밤은 어두워
닻 주었던 자리는 알 길이 없어라.
시정(市井)의 흥정 일은
외상으로 주고 받기도 하건마는.
꿈길
물구슬의 봄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불긋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나는 걸어가노라 이러한 길
밤 저녁의 그늘진 그대의 꿈
흔들리는 다리 위 무지개 길
바람조차 가을 봄 거츠는 꿈
왕십리(往十里)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올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밎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무심(無心)
시집 와서 삼년
오는 봄은
거친 벌 난벌에 왔습니다
거친 벌 난벌에 피는 꽃은
졌다가도 피노라 이릅디다
소식 없이 기다린
이태 삼년
바로 가던 앞 강이 간봄부터
굽이돌아 휘돌아 흐른다고
그러나 말마소, 앞 여울의
물빛은 예대로 푸르렀소
시집 와서 삼년
어느 때나
터진개 개여울의 여울물은
거친 벌 난벌에 흘렀습니다.
그리워
봄이 다 가기 전,
이 꽃이 다 흩기 전
그린 님 오실까구
뜨는 해 지기 전에,
엷게 흰 안개 새에
바람은 무겁거니,
밤샌 달 지는 양자,
어제와 그리 같이.
붙일 길 없는 맘세,
그린 님 언제 뵐련,
우는 새 다음 소랜,
늘 함께 듣사오면.
제비
오늘 아침 먼동 틀 때
강남(江南)의 더운 나라로
제비가 울고불며 떠났습니다.
잘 가라는 듯이
살살 부는 새벽의
바람이 불 때에 떠났습니다.
어이를 이별하고
떠난 고향의
하늘을 바라보던 제비이지요.
길가에 떠도는 몸이길래,
살살 부는 새벽의
바람이 부는 데도 떠났습니다.
가는 봄 삼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질
강남 제비도 안 잊고 왔는데.
어무렴은요
설게 이 때는 못잊게, 그리워.
잊으시기야, 했으랴, 하마, 어느새,
님 부르는 꾀꼬리 소리.
울고 싶은 바람은 점도록 부는데
설리도 이때는
가는 봄 삼월, 삼월은 삼질.
옷
술냄새 담배냄새 물 걸린 옷
이 옷도 그대의 입혀 주심
밤비에 밤이슬에 물 걸린 옷
이 옷도 그대의 입혀 주심
그대가 내 몸에 입히신 옷
저 하늘 같기를 바랐더니
갈수록 물 낡는 그대의 옷
저 하늘 같기를 바랐더니
김소월 작가 연보
1902년 음력 8월6일 곽산 출생. 본명은 정식 호는 소월(素月).
1915년 남산학교졸업. 4월에 오산학교 입학. 이때 스승 기억(金億)의 영향아래 시를 쓰기 사작.
1916년 3세 연상인 홍명희 딸 단실과 결혼.
1920년 시 [낭인(浪人)의 봄]. [그리워] 등을 <창조> 5호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
1922년 배재교보 5학년에 편입. 시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잔달래꽃], [먼후일] 등을 <개벽>에 발표.
1925년 시잡 [진달래꽃]을 매문사에서 간행.
1929년 시 [저급(低級)생활]을 발표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일부분을 삭제당함. 산문시 [길치부]를 <문예공론>에 발표.
1934년 이무렵 인생에 호의를 느낌. 고향 곽산에 돌아감.
1939년 이해 12월24일 오전8시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됨. 스승김억이 엮은 <소월시집>을 박문서관에서 간행.
1968년 이해 3월에 한국일보사에서 서울 남산에 시비(詩碑)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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