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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한용운 시모음

푸른 메아리 2021. 5. 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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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한용운 시모음 (1)

 

오셔요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요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은 쫒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안에 보드라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랍지만,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쫒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서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한용운 (1879~1944)

충남 홍성 출생, 용운은 법명(法名). 호는 만해(萬海). 불료에 귀의하여 승직에 있었으며, 조국에의 사랑과 연가풍의 시를 많이 썼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님의 침묵」, 소설 「흑풍」등이 있다.


 

당신이 아니더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이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가룹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테여요.

맨 첨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셔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비밀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조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에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낙화

떨어진 꽃이 힘없이 대자의 품에 안길 때

애처로운 남은 향기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가는 바람이 작은 풀과 속삭이는 곳으로 가는 줄을 안다.

떨어진 꽃이 굴러서 알지 못하는 집의 울타리 사이로 들어갈 때에

쇠잔한 붉은 빛이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부끄러움 많고 새암 많고 미소 많은 처녀의 입술로 들어가는 것을 안다.

 

떨어진 꽃이 날려서 작은 언덕을 넘어갈 때에

가없는 그림자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봄을 빼앗아 가는 아가의 발밑으로 사라지는 줄을 안다.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예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랑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거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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