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취미/좋은 글과 좋은 시

[한국의 명시] 한용운 시모음

푸른 메아리 2021. 5. 9. 17:03
728x90

[한국의 명시] 한용운 시모음 (2)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밭으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시는 '나룻배'와 '행인'을 제재로 하여, 참된 사랑의 본질이 자비와 인을 바탕으로 한 희생과 믿음에 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평범하고 쉬운 시어를 구사하고 있으면서도 정감의 절실한 깊이를 노래하여 시적 체험의 진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을 '나룻배'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나룻배'는 강을 건너게 해 주는 도구이며, 강을 거너는 일은 중생의 구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예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 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 시는 절대자인 "님"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명상의 심화를 성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1~5행까지는 자연현상에서 발견한 "님"의 존재를 의문형으로 되묻고 있고 6행에서는 그러한 "님"을 향한 구도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님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첨에 이별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하였습니까

다른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하였습니까

 

나는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첨으로 이별한 줄을 압니다.

만나고 이별이 없는 것은 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별하고 만나지 않는 것은 님이 아니라 길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님에 대하여 만날 때에 이별을 염려하고 이별할 때 만남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맨첨에 만난 님과 님이 다시 이별한 유전성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만나지 않는 것도 님이 아니요, 이별이 아닌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은 만날 때에 웃음을 주고 떠날 때에 눈물을 줍니다.

만날 때의 웃음보다 떠날 때의 눈물이 좋고

떠날 때의 눈물보다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에 있습니까.


 

나는 잊고저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 하여,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 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사랑

봄 물보다 깊으리라

가울 산보다 높으리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2021.05.09 - [도서 취미/좋은 시] - [한국의 명시] 한용운 시모음

 

[한국의 명시] 한용운 시모음

[한국의 명시] 한용운 시모음 (1) 오셔요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blueecho.tistory.com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