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金永郞, 1903~1950) : 전남 강진 출생, 본명은 윤식, 일본 청산학원 전문부 영문과 수학. <시문학> 동인으로 시경향은 서정시로서의 독특하고 전통적인 경지를 개척. 「영랑시집」과 「영랑시선」 등의 대표적 시집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덜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이 시는 '모란'을 소재로 하여 영원할 수 없는 지상적 아름다움에 대한 기다림과 비애를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모란이 피어 있는 짧은 순간의 기쁨을 위해 삼백예순 날을 기꺼이 참고 기다리겠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미적 완성을 위해 평생을 바쳐도 좋다는 유미주의적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 시는 뛰어난 시어의 조탁(彫琢)으로 우리말의 묘미를 한껏 살리고 있다.
☞ 이 시의 구조는 '봄을 기다림→봄의 상실→다시 봄을 기다림'과 같은 순환적 구조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에게 '봄'이란 모란이 피는 동안에만 느낄 수 있는 기쁨과 환희의 계절이며, 모라이 지는 순간 상실되는 유한성을 지나기 때문에 동시에 슬프고 고통스러운 계절이 된다. '찬란한 슬픔'이란 시어는 이와 같은 내포적 의미를 지닌다.
☞ 주제 : 아름다움에 대한 소망과 기다림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 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리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이 시는 김영란의 현실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실 순응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실에 맞서는 강한 의지를 '독'을 차고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험난한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저항하리라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 주제 : 결연한 삶의 의지를 다짐
두견(杜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는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삭이려 오고
여기는 먼 남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고나
몇 해라 이 삼경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겼느니
무서운 정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 밑을 돌아 나가는 죽음의 자랑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북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봄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디야
옛날 왕궁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셨더라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넝 소리 센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흐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물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생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였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죽어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짖는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이 살풋 물러서고
조고만 시골의 흥청 깨여진다.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대 감기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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